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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술, 음악, 정원, 주택, 무속신앙

한국사

by 우리들 블로그 2024. 5. 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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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국에서의 민속음악과 궁정음악과는 장르적 차이가 있는데, 민속음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민속음악의 모든 형태는 한국어로 장단이라는 리듬과 느린 멜로디 형태로 지속되어 왔습니다. 판소리라는 한국 민속음악은 한 명의 드러머와 한 명의 가수가 공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댄서도 있으며 내레이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판소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풍물은 북과 춤, 노래로 공연되고, 산조는 쉼 없이 빠른 템포로 연주됩니다. 사물놀이는 전통음악의 한 종류로 풍물과 산조를 기반으로 한 음악입니다. 농악은 농부의 음악을 뜻합니다. 한국의 궁정음악은 1392년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궁정음악에는 아악, 당악 및 향악이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지금도 많이 불리 연주되기도 합니다.

정원

한국의 개인 정원과 사찰 정원의 원리는 같습니다. 한국의 정원 가꾸기는 주로 한국의 민속종교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정원의 중요한 특징은 연꽃 연못입니다. 자연적인 냇물이 있으면 옆에 정자가 세워지고 거기서 물을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한국정원에서는 계단식 화단들이 일반적인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포석정은 신라시대에 지워진 것으로 한국 전통 정원에서 물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포석정 정원은 물줄기가 전복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왕국 말기에 왕의 손님들이 포석정 물줄기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으며 수로에 포도주잔을 띄우며 연회를 즐겼습니다.

경복궁 향원정

주택

한국의 전통가옥은 한옥이라 불린다. 전통적으로 거주지역은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선택되었습니다. 풍수지리는 선사시대로부터 한국의 샤머니즘과 한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한국의 삼국 시대 동안 중국으로부터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집은 언덕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지었습니다. 이것은 가능한 많은 햇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오늘날까지도 선호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는 건물이 향하는 방향, 건물의 모양과 건물을 구성하는 재료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의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 건설될 수 있습니다. 지역과 가족의 재산에 따라 개인적인 지면 구획이 크게 좌우됩니다. 귀족들은 주택의 바깥채에서 손님들을 접대하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사랑채에서 소를 키웠습니다. 가족이 부유할수록 집은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왕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가문도 99칸 이상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한국 전통가옥에서의 한 칸은 두 기둥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안채는 일반적으로 거실, 부엌 및 나무 바닥의 중앙 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방은 안채에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농부들은 어떠한 바깥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바닥난방은 온돌이라 하는데 선사시대로부터 한국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주요 건축자재는 목재, 점토, 타일, 석재 및 초가지붕입니다. 과거에는 건축재료로 목재와 점토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대까지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 많지 않습니다. 

무속신앙

한국에서 오래된 종교 중의 하나는 무속신앙으로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무속인은 대부분 여성이 종사하고 있지만 남성도 더러 있습니다. 한국의 무속인은 남녀 불문하고 무당 또는 만신으로 불렸지만, 박수는 남자 무당만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무속인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의 하나는 세습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병(귀신들림병)으로 고통받음으로써 무속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무당의 주요 역할은 의식과 굿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는 치유, 점술, 영혼 진정 등 다양한 수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사이지만 시각적, 청각적으로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굿은 밝은 색상의 정교한 의상, 의식 음식으로 높게 쌓은 재단과 술이 있으며, 전통악기가 함께하는 다양한 형태의 노래와 춤이 함께 합니다. 또한 부채, 종 및 칼 등의 소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징적으로 영혼 빙의가 잘 알려진 의식이지만 대부분의 세습 무속인과 일부 지역에서는 무속인의 역할이 영혼과 신에게 빙의되기보다는 그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굿을 하는 것에 대하여 사회적인 오명에도 불구하고, 만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잠재적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엄청난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고객들이 많이 있습니다. 20세기 한국의 정치적 혼란기에도 무속은 체계적인 박해에도 강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실제로 여러 축제와 더불어 굿은 무형문화 유산으로, 1962년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보존되고 있습니다. 높이 평가되고 있는 김금화 무당은 살아 있는 국보로 1985년 지정되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의 무속신앙은 정부에 대한 대항의 한 형태로 민주화 대중문화 운동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정치적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든 하지 않든, 민중운동 이데올로기 아래, 오랫동안 억압을 받아왔던 무속인들은 한국문화의 전달자로 그려졌습니다. 그들은 사회정의의 대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영혼에 사로잡힌 굿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무속신앙은 미디어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현대화된 세계에서 무속신앙 수행자들의 적응력이 높아지면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무당들은 그들의 대중 이미지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 그리고 자신들의 웹사이트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광고하거나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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