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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설립, 세종대왕과 한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19세기

한국사

by 우리들 블로그 2024. 5. 18.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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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설립

조선왕조(1392년~1897년)는  1392년 이성계 장군에 의하여 이상주의적인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졌습니다. 이성계 장군은 후에 태조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왕조라는 명칭은 고대왕국인 고조선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널리 퍼진 철학은 성리학이었습니다. 이것은 학문과 청렴한 삶을 살기 위하여 부와 권력의 지위를 물려주는 선비층인 학자에 의해 전형화된 학문이었습니다. 태조는 수도를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태조는 1394년 국가의 공식 종교로 성리학을 채택하였고, 강력한 관료주의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태조의 아들 태종과 손자인 세종대왕에게 행정, 사회, 경제 개혁을 시행할 수 있도록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이로써 왕조 초기에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였습니다.

세종대왕과 한글

세종대왕(재위 기간 1418~1450년)은 15세기 및 16세기 동안 조선은 교육과 과학 발전을 촉진하는 많은 지혜로운 통치자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통치자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몸소 한글을 창제하고 공표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인쇄술, 기상관측, 천문학, 역학, 도예, 군사 기술, 지리학, 지도 제작, 의학 및 농업 기술을 포함하는 문화적 및 과학적으로 커다란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조정안에서의 내분과 사회적 불안 및 정치적인 갈등 등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세종대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임진왜란(1592년~1598년)은  일본의 조선의 침략으로, 이로 인해 조선내부의 정치적 갈등 미 사회적 불안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힘을 모아 조선을 통하여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과 중국의 명나라의 도움으로 결국에는 조선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를 격퇴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거북선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명성을 높였습니다조선은 재건을 하면서 1627년과 1636년에 있었던 만주의 침략(병자호란)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국내 정치는 폭력으로 심하게 분열되고 해결되었습니다. 두 번의 만주 침략(병자호란) 후 새로운 청 왕조와 관계를 안정시킨 후, 조선은 200년 가까이 대외적으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격렬한 당파싸움이 거세졌습니다.

 

역사가 김자현은, 2016년 그녀의 편집자 William Haboush의 요약본에, 일본과 만주의 침략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습니다.

 

16세기 말의 일본의 침략(임진왜란) 1627년 및 1636부터 1637년까지의 만주의 침략(병자호란)으로부터 이 거대한 동아시아의 3대 강국의 충돌에서 나타난 출생, 언어 및 신념에 의해 하나가 된 자신들을 인식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특징을 나타냈습니다. 한국은 17세기 끝자락에 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8세기에 들어 영조(재위 기간 1724~1776)와 그의 손자 정조(재위 기간 1776~1800)가 새로운 르네상스를 이끌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늘리고 군대를 강하게 하였으며 문예부흥을 지원하였습니다. 인쇄술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활기를 되찾았으며, 출판물의 수와 품질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정조는 1776년에 규장각과 왕실 서재를 설치하여 여러 파벌의 학자들이 일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776년 이후 정치권에서의 부정부패와 사회 불안이 팽배하였습니다. 

 

19세기

19세기 후반에 정부는 광범위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고립주의 정책을 엄격하게 견지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은둔의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정책은 원래는 서양의 제국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곧 무역 개방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이 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불안정은 세도정치 시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조 왕이 죽은 후 어린 순조(재위 기간 1800~1834)1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안동 김씨 일족의 대표인 김조순이 순조 왕의 섭정자로 존재하면서 실질적인 정권의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부안에서 혼잡하고 노골적인 매관매직, 특히 세 가지 주요 세입 분야인 토지세, 병역 및 국가의 곡물 제도가 농민들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행정관 같은 직책을 구입할 수 있었고, 관료의 힘으로 농민들에게 그들의 약탈을 뒤집어 덮을 수 있었던 향리라고 불리던 지방 관료의 부패였습니다. 이전에는 귀족 계급으로서 신분에 대하여 존경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력이 있었던 양반 가문들은 지역 사회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다는 평민 수준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부패, 상류층에 의해 착취 당하고 권리 박탈된 자들의 산적 행위가 증가하는 가운데, 가난한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토지, 도구와 생산물 등의 자원을 모으고자 하였습니다. 1801년 노예를 소유하는 관행을 끝내기 위해 정부가 노력하였지만 한국의 노예제도는 1894년까지 합법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주 관대했으며, 특히 서울 지역과 그 주변에서는 더욱더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풍양 조씨 일족은 한국 순교자로 알려진 사제들과 추종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상류층의 가입을 단념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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